1946년 제2차 국공내전 발발 시에 국민당 총병력은 430만 명이었고 이 중 정규군은 356만 명으로 육군 86개 사단, 248개 여단 약 200만 명, 특종병 36만 명, 공군 16만 명, 해군 3만 명, 기타 군사 기관 총 101만 명을 포함하고 이 외에 비정규군이 74만 명이었다. 86개 사단 중 미국제 또는 반(半)미국제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부대는 22개에 불과했다. 더구나 중국 전장에서는 미제 무기나 장비가 실용적이지 못했다. 천이(陈毅)가 전쟁 지휘 경험을 총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미제 무기는 화력은 강하지만 익숙지 않아서 기민하고 융통성 있게 움직일 수 없었고, 또 소모되는 탄약은 매우 많은데 운송수단이 부족해서 공급할 수가 없었다. 미제 장비는 이(利)보다 해(害)가 많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도 이와 해가 대등했다.”
같은 시기, 중공 인민해방군은 약 127만 명이었고, 이 중 야전군 61만 명, 사단급 22개, 여단급 94개, 그 외에 지방 부대와 후방 기관이 약 66만 명이었다. 인민해방군의 장비는 국민당군과 비교하면 낙후했다. 단, 그렇다고 (중국 내 온라인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구식 소총만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차 국공내전 발발 시에만 해도 인민해방군은 포병 14개 단, 17개 영과 38개 연(連)을 보유하고 있었고 기병 소총, 자동소총, 경기관총 등 각종 총기 수량도 적지 않았다. 병력 수는 국민당군에 비해 대략 3.4:1 정도로 열세였다. 더구나 국민당군은 일본군으로부터 대량으로 획득한 무기를 갖고 있었고, 무기, 기동성 면에서 절대 우세였다.
내전 발발 1년 후인 1947년 7월에 중공의 군사력은 작전 부대 90만 명, 지방 부대 60만 명 그리고 군사 기관 인원 40만 명으로 총 190만 명에 달하여 국민당군과의 비율 차가 약 2:1수준으로 좁혀졌다. 다시 1년 후인 1948년 6월경에는 국공 쌍방의 군사력 차이가 더욱 줄어서 1.3: 1 정도로 기본적으로 평형상태에 도달했다. 그 2년간 국민당군 손실 병력은 약 264만 명이었고 보충을 거쳐서 365만 명으로 회복했다. 그러나 그중 일선의 작전에 배치할 수 있는 병력은 174만 명에 불과했다. 중공 인민해방군은 2년간의 내전 중 손실 병력이 약 80만 명이었으나 신규 징집병 110만 명, 복귀한 부상병 45만 명, 사상개조 포로 80만 명, 그리고 투항한 국민당 부대 등을 합하면 총 280만 명에 달했다. 1949년 2월에는 인민해방군 병력 수가 국민당군을 압도적으로 추월했다. 국민당군 총병력은 204만 명으로 줄었고 이 중 작전에 동원할 수 있는 육군 정규군은 약 146만 명 정도였으나 인민해방군 총병력은 358만 명을 넘어섰다.
이상의 수치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싸움이 계속될수록 인민해방군은 늘었고 국민당군은 줄었다. 또한, 국민당이 미국 원조를 제한적으로 받았지만 인민해방군은 노획을 통해서 대량의 자동무기, 대구경 화포, 탱크, 자동차 등 현대 장비를 획득했다. 야전군 병종(兵種)도 보병, 포병, 탱크병, 기병을 모두 완비했고 장비 면에서도 더 이상 명확한 차이는 없어졌다.
중공 측이 1950년 7월에 발표한 ‘해방전쟁 4년 종합 전적’에 의하면 1946년 7월부터 1950년 6월 기간 중 인민해방군이 섬멸한 국민당군은 정규군 554만 2470명, 비정규군 252만 8880명으로 총 807만 1350명이다. 이 중 포로 458만 6750명, 부상자 171만 1110명, 투항자 63만 3510명, 봉기자 84만 6950명, 접수 개편자 29만 303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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