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군부 내 장군들의 전쟁 지휘 능력에 대한 평가는 각 시기마다 다르다. 가령, 쑤위(粟裕)는 제1차 국공내전 홍군 시기와 항일전쟁 시기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제2차 국공내전, 즉 ‘해방전쟁’ 시기에는 연전연승하면서 린뱌오(林彪)와 함께 인민해방군 내 대규모 병단 지휘를 맡길 수 있는 장군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쑤위가 지휘 능력을 최고 수준으로 발휘한 때는 화이하이 전투에서였다. 총괄적으로 평가한다면, 홍군 시기에는 쉬샹첸(徐向前), 항일전쟁 시기에는 펑더화이(彭德怀) , 해방전쟁 시기에는 린뱌오와 쑤위가 가장 걸출했다고 할 수 있다.
쉬샹첸(徐向前)은 매우 긴 기간 ‘홍4방면군’ 총지휘 요직을 맡았고, 후베이 지구에서 후베이·허난변구(鄂豫邊區) 근거지를 개척했다. 장정 전에는, 도시를 포위하고 지원 공격을 하여 황안(黃安), 상황(商潢), 쑤자부(蘇家埠), 황광(潢光) 지구에서 4대 전투 승리를 거두었고, 적군 6만 명을 섬멸했다. 장정 중에는 ‘반3로 포위공격(反三路圍攻)’, ‘반6로포위공격(反六路圍攻)’ 승리와 쓰촨·싼시(川陜) 근거지를 새로 개척하여 부대 규모를 8만 명으로 키웠다(당시 중앙 홍군은 8000명 규모였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항일대학 교장 등을 맡았고 전투 지휘는 하지 않았다. 해방전쟁 시기에는 건강이 안 좋았으나, 척박한 조건하에서 ‘산시작전’을 지휘하여,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지휘하는 류덩대군(劉鄧大軍)이 남겨놓은 6만 명의 지방부대로 국민당 옌시산(閻錫山)의 30만 대군을 섬멸했다. 쉬샹첸의 군사 능력에 대해서는 군신(軍神)이라 불리는 류보청이 군사학원 원장 시절에 “우리 군 중 전쟁 능력이 가장 강한 두 사람은 쉬샹첸과 쑤위 (粟裕) 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펑더화이(彭德怀)는 홍군 시기부터 맹장으로 명성이 높았고, 장정 시기에는 린뱌오가 마오쩌동의 지휘 실책을 비판하면서 홍군의 지휘권을 펑더화이에게 넘기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항일전쟁 시기에 펑더화이는 당시로서는 중공 역대 최대 규모의 전투인 ‘백단대전’을 발동하고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전쟁 규모와 국제정치적 의미가 가장 컸던 ‘조선전쟁’에서 백만 대군의 총지휘를 맡아서 당시 세계 최강 미군과 국제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로 인정받는 결과를 끌어냈다.
린뱌오(林彪)는 홍군 내에서 펑더화이, 황공뤠(黃公略), 주더와 함께 마오 휘하의 4대 장군으로 불렸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핑싱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그 직후에 총상을 당해서 치료를 위해 소련에 가야 했다.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는 동북 지구에서 ‘랴오닝·션양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만주지구를 중공 세력권 내의 배후 지원 및 보급기지로 만들어냄으로써 전체 전쟁 승리의 기초를 쌓았고, 휘하의 ‘4야전군’을 지휘하며 동북에서 남쪽 하이난섬(海南島)까지 평정했다. 린뱌오는 중공 고급 장교 중 마오의 신임을 가장 두텁게 받았다.
쑤위(粟裕)는 후난성의 소수민족인 동족(侗族) 출신이고, 192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난창봉기 참여 후, 징강산에 합류하여 5차례에 걸친 국민당 군대와의 전쟁을 치렀다. 장정 기간에는 남방지구에서 유격전을 조직·투쟁했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신사군 제2지대 부사령관, 강남 지휘부와 쑤베이(蘇北) 지휘부 부지휘를 역임했고, 1941년 신사군 사단장을 역임했다.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는 화중야전군 사령관, 화동야전군 부사령관, 정치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지난(濟南) 전투, 화이하이 전투, 장강 도강 전투, 상하이 전투 등을 지휘해서 결정적 공을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후에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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