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동이 징강산 지구에 들어가서 ‘토비 혁명 노선’을 추진하면서부터 중공의 기본 전략은 산간 오지와 농촌지구를 근거지로 하는 유격전 위주 전투 전술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일전쟁 기간에 옌안과 섬서-간수-닝샤(陕甘宁) 지구 근거지를 중심으로 종합적 실력을 강화한 후에는 전투 전략과 전술을 종래의 유격전 위주에서 운동전 위주의 전면 공세로 바꾸었다.
또한, 실제 전투 수행을 위한 보급 추진 측면에서도 농촌보다 도시를 중시해야 한다는 야전군의 요구가 갈수록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1947년 이후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도시들을 점령, 접수하게 되면서 중공은 전략 중심을 농촌에서 도시로, 즉, 도시를 주(主)로 하고 농촌을 보(輔)로 하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마오쩌동은 1948년 10월, “도시와 공업에 대한 관리 공작을 강화하고 당의 공작(工作) 중심을 점진적으로 향촌에서 도시로 이전해야 한다”라는 방침을 제시했다. 1949년 2월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금후에는 과거 20여 년간 견지해 온 ‘선향촌 후도시(先乡村后城市)’ 전략을 ‘선도시 후향촌(先城市后乡村)’으로 개변(改变)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개변에 적응하기 위해서 마오쩌동은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군대 간부는 응당 도시접관에 관한 모든 것을 학습, 습득해야 하고 필히 도시에서 제국주의와 국민당 반동파에 능숙하게 대처하고 자산계급에 대한 대응,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지도, 청년 동원과 조직, 신구(新舊) 간부의 단결과 훈련, 공업과 상업의 관리, 학교·신문·통신사와 방송국 관리, 외교 사무 처리, 각 민주 당파 및 인민 단체의 문제 처리, 도시와 향촌의 관계 조절, 양식·석탄·기타 필수품 문제의 해결, 금융과 재정문제 등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을 이해하고 숙지해야 한다."
마오는 이어서 “만일 우리 간부가 도시 관리 방법을 신속하게 습득하지 못하면 우리는 심각한 곤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1949년 3월, 중공중앙 7기 2중전회에서는 ‘당의 공작 중심을 향촌에서 도시로 이전한다’는 전략을 정식으로 확정했다. 마오쩌동은 회의 정치보고에서 “당이 즉각 건설사업에 착수해야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도시 관리를 학습·습득해야 하고 도시의 중심 임무를 회복·발전시켜야 한다”라고 했다. 이어서 “현재 직면한 도시 관리는 창당 이후 최대의 난제라 할 수 있다. 필히 도시의 관리와 건설을 학습·습득하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마오쩌동의 이 같은 지시가 중공 정권 출범 전후 도시 공작 업무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도시들에서 접관(接管) 이후 상공업 파괴와 군중에 의한 집단 물자 약탈 등의 현상이 발생했다. 장기간 농촌에서 생활 및 전투해 온 중공의 수많은 간부, 장병들은 도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였다. 이들은 여전히 부지불식간에 농촌에서 군중을 발동하여 토지혁명투쟁을 추진하던 방식을 도시에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도시에서 지하공작을 담당했던 중공 간부들은 도시에 대한 파괴 공작에만 익숙했고 ‘건설’이란 용어부터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결과 초기 도시접관 시기에 수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했다.
1948년 4월 19일, 중공 허베이국(局)이 이러한 상황을 서면으로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이 보고서에 “도시 또는 향진(鄕鎭)에서 상공업 파괴는 일종의 농업사회주의 사상이고 그 성격은 반동적이고 낙후적이고 도퇴(倒退)적이다. 필히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라고 메모로 지시했다. 이후 화북 지구에서 중국 전국에 이르기까지 중공은 이 정신에 의거해서 간부 교육을 진행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중공은 두 가지 시책을 채택했다.
첫째, 도시 진입(入城) 전에 도시에 대한 건설·보호 방침을 명확하게 하고 이와 함께 비교적 경험이 있고 정책 관념이 강한 간부를 선발하여 각종 직무에 배치하고 골간(骨干) 및 핵심 역할을 담당케 했다.
둘째, 도시 진입 전에 이러한 간부들에 대한 집중 훈련을 진행했다. 지속적으로 사상·정책 교육을 실시하고 접관할 도시에 대한 사회 정황, 국민당 정권의 정황, 군중의 동태와 도시 생활습관, 상공업 보호 발전, 군중 발동을 통한 민주 질서 건립 방법 등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 또한, 출신이 서로 다른 각종 간부들의 사상적 특성을 고려한 구체적 교육도 강화했다. 예를 들면 농촌에서 온 간부에 대해서는 농촌과 농민 관점을 철저히 극복할 것을 요구했고 도시 지하공작자들에 대해서는 익숙해진 파괴 관념과 사고를 극복하고 건설 사상으로 바꾸도록 교육했다. 동시에 도시 진입 인원에 대해 다음 4가지를 불허한다는 기율을 정했다.
⦁국가, 공공단체와 군중의 사소한 물건도 취하는 것을 불허한다.
⦁혼란한 기회를 이용해 물건을 싸게 사는 것을 불허한다.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불허한다.
⦁연극, 영화 관람을 불허한다.
1947년 11월 12일,인민해방군 화북야전군이 허베이성 스먼(石門 ,현 石家庄)시 공략에 성공하면서 중공이 최초로 중대형 도시에 입성했다. 원래 중공은 농촌에 근거지를 두고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을 기초로 하고 있었으므로, 전투 승리 후 도시를 점령했다 해도 단지 며칠 정도 짧은 기간 머무르면서 휴식과 보급 문제 해결하고, 반혁명 기구 파괴, 반동분자 처벌 등을 마치고 떠났으나, 이번에는 점령한 도시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도시의 각종 기능 부문을 접관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화북 지구의 중심 도시 스자좡은 화북 평원의 중부에 위치하고 베이징~우한(京漢) 철도, 스자좡(石家庄)~타이위안(石太) 철도, 스자좡~청더(石德) 철도가 통과하는 교통 결절이고 지리적 요충지여서 허베이성(冀)과 산시성(晋)의 목구멍(咽喉)이라 불린다. 1947년 11월 12일, 인민해방군 화북야전군이 이 도시에 입성할 당시에 도시 인구는 20만에 못 미쳤으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도시 경제는 전쟁 직후의 붕괴 상태에 직면해 있었고 대규모 실업, 물자 부족, 물가 폭등 상황 속에 굶주린 시민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공이 당면한 과제는 이 도시에 대한 접수와 관리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라는 것과 함께 그것이 중공의 도시 집정(执政) 능력에 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고 향후 중공이 지속적으로 접관(接管)하게 될 도시 공작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란 점이었다.
1947년 11월, 인민해방군이 스자좡시를 점령한 후, 중공중앙은 최우선 중대 과제를 이 도시의 전쟁 상처를 조속히 회복하는 것과 인민의 기본생활 보장이라 설정했다. 당시 ‘중앙공작위원회’ 서기 류샤오치는 이 도시의 접수 및 관리 업무를 매우 중시하여, 스자좡시로 파견 보내는 책임 간부들을 모두 접견하고, 상공업 보호, 도시 경제발전 방침 등 구체적 정책과 주의 사항 등 도시 공작 정책과 군중 발동 문제 등에 대해 대화하고 지시했다. 동시에, 중앙공작위원회는 이후의 도시 공작을 중시하여, 계속 각종 업무팀(工作組)을 파견하고, 업무 지시를 하달했다.
한편, 중공 산시·차하얼·허베이(晋察冀) 중앙국은 스자좡시에 진입하기 전에 중앙 기관과 각 근거지에서 대량으로 간부들을 선발하고 도시 공작 업무 담당 준비를 했다. 스자좡시와 약 280km거리에 있는 당시 허베이성 수도였던 바오딩시 푸핑(阜平)현에서 시 위원회 주요 구성원을 임명하고, 이들이 인민해방군과 함께 스자좡시에 입성토록 했다. 1947년 11월 17일에는 스자좡시에 입성한 간부 수가 모두 800여 명에 달했다.
‘중공중앙공작위원회’가 스자좡시 위원회와 시정부를 조직·설립하고 도시접관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선 과제는 질서와 안정을 회복하고 공작 업무 중의 착오를 적시에 바로잡고 간부 당원의 사상을 정돈하고 접관 업무 공작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각급 당정 기구를 건립하고 정상적 업무 추진을 시작한 후에 시 위원회와 시정부는 적시에 국민당 잔여분자 숙청, 도망간 지주의 토지와 재산 처리 등 공작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시민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경제, 과학교육, 위생 공작 등을 추진했다. 신생 스자좡시 정권이 중공중앙공작위원회(工委)와 산시·차하얼·허베이 중앙국의 지도하에 처리한 수많은 당면 난제 처리 경험은 이후 중공이 접수한 대·중 도시의 도시접관 공작의 모델이 되었고, 스자좡시에서 경험을 축적한 관리 간부 대다수가 연이어 점령·접수한 기타 대·중 도시의 접관(接管) 요원으로 파견되었다.
1947년 11월 12일, 중공이 파견한 간부들이 스먼시 입성 당일에 중공 스먼시 위원회를 조직하고 공작 업무를 시작했다. 11월 14일, ‘산시·차하얼·허베이 변구(晋察冀邊區) 행정위원회 명령’에 의거하여 산시·차하얼·허베이 변구 스먼시 정부를 건립했다. 구(舊) 국민당 제3군 군부 건물(正太 철로국 업무 건물)에 시정부 대외 판공처를 설립하고 간판을 걸고 포고문을 선포했다.
11월 17일에는 황징(黄敬)을 주임으로 하는 ‘스먼시 괴뢰물자관리위원회(石門市敵偽物資管理委員會)’를 설립했다. 그러나 구 국민당정부 통치하의 각 기관들의 소유 물자를 압류하는 과정에서 각 단위와 작업조별로 무질서와 혼란이 돌출되었다.
스먼시 초대 시장에는 커칭스(柯慶施)가 취임하고 업무를 시작했다. 시정부 내 조직으로 비서처, 사회국, 공상국(工商局), 재정국, 교육국, 위생국, 공안국 그리고 인민 법원을 설치했다. 1947년 11월 21일, 중공 스먼시 위원회(石門市委)가 첫 번째 회의를 개최하고 “현재 우선 요구되는 공작은 군중 발동(发动)과 당 방침과 정책의 선전”이라 확정하고 신속하게 공작조를 파견하여 스먼시의 각급 당정 조직을 건립했다.
정부 건립 초기에 국민당의 보갑제도(保甲制度)를 폐지하고 이전의 6구제는 유지하면서 구 밑에 가(街)를 설립했다. 각 구에는 통일 지휘하는 공작위원회를 설립하고 매 구별로 6개 공작조(工作組)를 편성하여 각 가에 파견 배치하고 빈민, 업종별 노동조합 및 공작위원회를 지휘하는 무장(武装)으로 빈민 규찰대와 업종별 노동자 규찰대를 조직했다. 1947년 11월 16일부터 각 가에서 빈민회(貧民會)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주로 보갑장(保甲長)에 의지해서 가도(街道)의 사회 정황을 이해하고 빈민과 대화하고 회의를 개최한 후 이들을 연계해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조를 편성하고 빈민 대표를 선출하여 정식으로 빈민회를 조직·구성했다.
때로는 간부가 빈민 내부로 깊이 들어가 빈민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고생담을 묻기도 했다. 영향력 있는 인사를 찾은 후에는 그를 통해서 기타 빈민들과 연합했다. 빈민회는 정식 등기를 통해서 성립되었고 또한 각 업종을 단위로 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소조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가(街) 대표를 만들어낸 후에 빈민갱생회(貧民翻身會)를 조직했다. 군중을 조직한 후에는 노동자 빈민이 주도한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빈민회가 피해와 고난 경험을 고발하게 하는 쑤쿠(訴苦) 투쟁을 연속 5~7일 정도 기간에 걸쳐서 진행하기도 했고 11월 20일에는 청산 투쟁(清算斗争)으로 고조시켰다. 우선 소조 회의를 개최하여 쑤쿠 투쟁을 진행하면서 목표를 조준해서 투쟁 대회를 개최했다. 일반적으로 7인 단위로 구성되는 ‘투쟁주석단’을 조직·구성하고 회의를 진행했다. 투쟁회가 일체를 조직했고 함성과 구호 속에서 반동, 반혁명분자로 적발된 사람을 묶고 때리고 죽이고 재산을 압수하고 나눠 가졌다. 규찰대는 매일 모여서 같이 숙식하면서 투쟁 과실을 나누거나 먹어치웠다. 그 결과 혼란이 야기되었고 임의로 사람을 때리고 체포하는 현상이 연이어 출현했고 점차 상공업 파괴가 초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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