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더화이가 그렇게 베이징호텔 방바닥 카페트에 요를 깔고 뒤척이며 잠을 설친 그 다음 날(1950.10.5) 아침에 마오의 지시를 받은 덩샤오핑이 베이징호텔로 펑더화이를 찾아와서, 약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후, 함께 차를 타고 중난하이로 갔다. 중난하이에 도착한 후에는 마오쩌동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 펑더화이를 마오쩌동의 서재인 국향서옥(菊香書屋)으로 안내했다. 서재에서 생각에 잠겨 서성이던 마오가 펑을 맞았다. 악수를 하고 함께 소파에 앉았다. 마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를 부른 것은 조선 출병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싶어서다. 어제 회의에서 한마디도 안 하던데 그건 평소의 자네와 많이 다르지 않은가?”
“어제 급히 올라오면서 뭔가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은 했지만 머릿속엔 여전히 서북 건설 사업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게다가 참전 여부에 대한 의견 차이가 이렇게 클 거라고도 생각 못 했기에 우선 여러 의견들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오후에도 계속 회의를 해야 한다. 자네는 어제 늦게 참석해서 발언하지 않았지만 모두 들었겠지?”
잠시 말을 멈춘 후 마오가 무거운 어조로 이어서 말했다.
“이번 결정은 정말 쉽지 않았네! 한마디 명령으로 삼군이 출동해야 하는데 수십만 명의 생명이 걸린 문제다. 결과가 안 좋으면 국내 정국이 위험해지고 심지어 강산(江山)을 모두 잃게 되고 나 마오쩌동은 역사와 인민 앞에 얼굴을 들 수 없게 될 것이다. …… 이 회의는 내가 열자고 한 것이고 당내외의 동지들에게 참전에 불리한 요소들을 들어보기 위한 것이다. 어제도 회의 끝난 후에 여기서 밤늦게까지 린뱌오, 가오강 두 동지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여전히 내게 출병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하더군. 잘못하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갈 수도 있다는 거야. 스탈린 동지의 걱정과 같아.”
마오쩌동의 얼굴은 최근 수일간 이 문제로 고민하며 잠을 못 자서 초췌하고 피곤이 쌓여 있었다. 마오의 얼굴 표정을 보고 있던 펑더화이가 돌연히 일어나서 단호하게 내뱉었다.
“따(打).”
때리자(打)는 말이었다. 직설적인 성격과 기풍을 가진 펑이 오랜 전우이자 동지이고 상관인 마오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작정한 바를 더 미룰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 것이다.
마오가 순간적으로 놀라 멍한 표정으로 펑을 주시했다. 펑더화이가 다시 큰 소리로 내질렀다.
“출병(出兵), 들어야 할 말 모두 들었고 밤새 생각했습니다.”
마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령관은 누가 하지?”
“주석이 정해주십시오.”
“자네가 맡으면 어떨까?”
“복종(服從).”
순간 담배를 쥔 마오의 두 손가락이 입술 앞에서 멈춘 채 미묘하게 떨렸다.
그러나 펑더화이도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장비 차이가 큽니다. 만일 소련이 완전히 손을 뗀다면 이 전쟁의 결말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오가 물었다.
“만일 소련 원조를 얻고, 우리 장비를 양호하게 개선할 수 있다면 해볼 만할까?”
펑이 한참 생각한 후에 답했다.
“가능합니다. 문제는 그 원조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에 달렸습니다. 공군 엄호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 이 문제를 양호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겨뤄볼 만합니다.”
오랜 전우이자 동지로서 그의 군사적 감각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펑이 자신의 어려운 결단을 지지하며 맞장구쳐 주는 것 아닌가! 마오는 감동했다. 세계 최강의 미군과 맞서는 전쟁을 펑이 해볼 만하다 하니 이제 중국도 미국, 소련과 함께 세계 패권국가의 대열에 진입할 수 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보아 하니 자네는 100% 나와 의견이 같다. 오늘 오후 회의에서 잘 이야기해 주기 바란다.”
그날 오후, 전날에 이어서 속개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펑더화이가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조선 지원 출병은 필요하다. 최악의 상황이 된다 해도 해방전쟁 승리가 몇 년 늦어지는 셈으로 치고 산악지구로 다시 들어가서 몇 년간 다시 유격전을 할 각오를 하면 된다. 미군이 조선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되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이 우리 집 문 앞에 포진하는 셈이 된다. 침략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구실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호랑이가 언제 공격할까? 결국 호랑이의 위와 식욕에 의해 결정된다. 앉은 채로 잡아먹힐 수는 없다. 어차피 싸울 거라면 먼저 때리는 게 좋다. 때리고 한판 붙고 난 후 다시 건설하자. 이미 그들이 침략해 왔는데 한판 붙지 않으면 우리를 얕잡아보고 언제고 다시 시비를 걸어올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사회주의 건설도 곤란해진다. 전쟁을 한다면 그들은 속전속결이 유리할 것이나 우리는 장기전이 유리하다. 그들은 정규전이 유리하고 우리는 일본에 대항하던 그런 방식이 유리하다. 현재 우리는 전국의 정권을 갖고 있고 소련의 지원도 있으므로, 항일전쟁 시기보다 유리한 점이 많다. 국가의 앞날을 생각한다면 응당 출병해야 한다.”
펑더화이의 발언이 끝난 직후에 마오쩌동이 회의를 마무리하는 발언을 했다.
“며칠간 회의에서 많은 동지들이 출병 불가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잊지 말자. 조선 인민과 조선 당의 동지들이 우리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과정에서 중국혁명 사업을 위해 많은 피를 뿌린 것을. 현재 그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백 가지, 천 가지 이유가 단 한 가지 이유를 반박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 미국이 우리보다 대포도 많고 원자탄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사람이 쓴다. 대포가 쓰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악물고 독한 마음으로 그들이 그들의 원자탄을 쏘면 우리는 우리의 수류탄을 던질 것이다.”
1950년 10월 5일에 마오쩌동과 중공 정치국 위원들이 조선 출병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중국혁명 성공의 완결을 위해서는 어차피 미국과 한판 붙어야 하고,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그 전쟁터를 조선반도로 하고, ‘항미원조’ 명분으로 치러내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로부터 2주 후인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 4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넜고, 10월 25일에는 신의주와 평양 사이에 위치한 평안도 운산에서 미군을 기습 공격했다. 중공중앙군사위원회가 전략적 고려하에 ‘중국인민 지원군’이라 칭한 명의로 명령을 하달한 때도 미군과 첫 전투를 벌인 그날(1950.10.25)이었다. 펑더화이가 사령관 겸 정치위원, 덩화(鄧華, 1910~1980년)가 부사령관 겸 부정치위원, 홍쉐즈(洪學智, 1913~2006년)와 한셴추(韓先楚, 1913~1986년)가 부사령관, 제팡(解方, 1908~1984년)이 참모장, 두핑(杜平, 1908~1999년)이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5), 다섯 차례 대전투와 정전협정-박인성의 중국현대사(32) (1) | 2023.10.17 |
---|---|
한국전쟁(4), 마오안잉의 참전과 죽음-박인성의 중국현대사(31) (2) | 2023.10.17 |
한국전쟁(2), 펑더화이, 베이징으로-박인성의 중국현대사(29) (1) | 2023.10.16 |
한국전쟁(1)-김일성의 남침 준비와 중공의 출병 논의-박인성의 중국현대사(28) (1) | 2023.10.16 |
토지개혁투쟁의 실상-박인성의 중국현대사(27회) (0) | 2023.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