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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5), 다섯 차례 대전투와 정전협정-박인성의 중국현대사(32)

중국현대사

by 박인성의 중국이야기 2023. 10. 1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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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례 큰 전투

조선으로 출병한 후 중공군은 모두 5차례 큰 전투를 치렀다. 19501024일 신의주와 평양 중간의 운산에서 중공군의 기습 공격으로 진행된 1차 전투에서 패한 연합군과 남한 국방군은 압록강 변에서 남쪽으로 평양까지 후퇴했고, 2차 전투에서는 더 남쪽으로 38선까지 200km를 후퇴했다. 19501231일부터 이듬해 18일까지 벌인 3차 전투에서는 중공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했다.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단동시내 북측에 항미원조기념관이 있다. 이곳에서 당시 중공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모습의 사진 등을 보면 중공군의 장비와 무기 등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군과는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끄는 마차에 대포를 싣고 미군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산길로 이동하는 중에 폭격으로 산길 중간이 파여 큰 구덩이가 있으면 구덩이 양 끝에 목판을 대고, 대포를 실은 마차가 무게를 견디고 건너갈 수 있도록, 병사들이 구덩이 밑으로 들어가서 목판 밑에서 손과 등으로 목판을 받치고 있는 방법으로 마차를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한 중공군은 공군력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약 200km에 달하는 땅굴과 참호, 연결 교통로를 구축하고 야간전투 위주로 행동했다. 그들은 매복과 기습에 강했다. 당시 중공 지원군과의 전투를 경험한 미군 사병 출신 인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진격해 올 때는 마치 일본군의 가미가제 같았다. 그들은 생명에 대한 애착이나 존엄,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펑더화이와 김일성의 언쟁

연합군과 남한 국방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195114일에 다시 서울 이남으로 후퇴했다그러나 3차 전투 이후 연합군과 한국군의 퇴각은 전쟁 발발 초기에 혼비백산하며 밀린 것과 달랐다. , 맥아더의 후임 리지웨이(M. B. Ridgway)의 지휘와 작전계획에 따른 계획적 후퇴였다.

 

펑더화이는 3차 전투 승리 후 점령한 서울에서 리지웨이 지휘하에 퇴각하는 미군과 남한 국방군의 형세를 분석한 후, 이들의 계획적 퇴각 의도를 읽었다. 그렇다면 공군력과 무기 및 장비 열세 속에 보급로가 길어지고 불안정해지는 위험한 국면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대 휴식과 정비를 결정했다. 이 같은 펑더화이의 판단은 오랜 전투 경험을 기초로 형성된 감각과 능력이었고, 그 후 전투 진행 결과에 의해 중공 지원군의 희생을 대폭 줄인 결단이자 조치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김일성과 소련 군사고문 스티코프(Shtykov)는 퇴각하는 미군과 남한 국방군을 계속 추격·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펑더화이는 계속 강력하게 추격·공격을 주장하는 김일성과 언쟁 도중에 정색을 하고 그럴 거면 네가 지휘해라라고 대꾸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모두 겪어낸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을 도발한 후 감당하지 못해 지원을 간청한 애송이가 또 다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요구를 하며 고집을 부리자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 후의 전황 전개는 펑더화이가 예상하고 우려했던 바와 같이 전개되었다. 바로 2월부터 리지웨이가 지휘하는 미군이 다시 반격하면서 4차 전투가 시작되었고, 중공군은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방어선도 38선 북쪽으로 100km 이상 밀렸다. 그 뒤에 4월부터 5월까지 진행된 5차 전투에서 중공군은 또 다시 대패하고 170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5차 전투 후 19522월 마오쩌동은 38선에서 장기적으로 대치한다는 지구전 전략을 제시했다. 이후 중공군이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백 리의 전선에 참호를 구축하면서 전쟁은 대치 국면에서 국지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정전협정

5차 전투 이후 중공군은 수세에 몰렸으나, 미군도 사상자 수가 10만 명을 넘어서면서 미국 국내에서 전쟁 중지를 요구하는 여론과 정치적 압력이 커졌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195335, 스탈린의 죽음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이 계속 동아시아 한반도의 전쟁터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상황이 소련의 유럽 전략 추진에 유리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한반도의 미중 전쟁 상황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정전협상에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이 죽은 후 약 4개월 후인 19537월에 미군과 중공군 양측은 정전협상을 시작했고, 727일에 정전협정서에 조인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중공은 자신들이 세계 최강 미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중공 측 사상자 수는 38만 명에 달했고 소모 군비도 20억 달러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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