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운동"이라는 것이 그 정도로 황당하게 전개된 배경과 원인은 마오쩌똥이 오만해져서 초심을 잃고, 혁명 성공 이전에 중시하던 실사구시와 군중노선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마오쩌동의 생각과 태도가 이렇게 변하게 된 배경과 요인으로는 한국전쟁에서 거둔 성과를 꼽을 수 있겠다. 즉, 중공 정권 출범 채 1년도 안된 상태에서 발발한 한국전쟁에 항미원조(抗美援助) 명분으로 출병, 참전하여,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온 당시 세계 최강의 미군과 국방군, 연합군 군대를 북위 37도선인 평택-안성-제천-삼척 선까지 밀어 붙인 후, 다시 전쟁 발발 이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던 상황과 비슷한 상태로 정전협정까지 이끌어 냈으니, 이는 중공의 입장에서는 “승리”라고 할 수 있었고, 이미 혁명 성공후 득의양양한 상태에 있던 마오쩌동의 자신감을 한단계 더 높여 주었다. 이제 마오는 더욱 오만해지면서 (원래의 실사구시를 중시하던 태도에서 이탈하여) 낭만적 환상에 빠져서 공산주의로 가는 지름길, 즉, 공상적 좌경모험주의 농촌사회주의 조기 실현 노선을 채택, 추진하게 된다.
소위 ‘대약진운동’(1958∼1962년)은 1957년 9월, 중공 8기3중전회에서 마오쩌동이 ‘반모진(反冒進)’ 정책을 비판하고 농업 대약진의 실제 강령이라 할 수 있는 ‘농업발전강요 14조’를 통과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반모진’이란 전년도(1956년) 경제 공작 중 지나치게 조급하고 무모하게 추진하는 맹동주의 상황을 개선하자는 합리적 의견이었으나, 이것이 마오에게 비판받은 후 좌경 맹동주의가 더욱 확산되었고 그로 인한 폐해도 커졌다. 전국 대부분의 성, 자치구 당위원회는 각급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공농업 생산을 고조시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이어서 11월 13일에는 ≪인민일보≫가 “전 인민이 떨쳐 일어나 40개조 강령을 토론하고 농업생산을 새로이 고조시키자”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처음으로 ‘대약진(大跃进)’이라는 용어를 제시했다.
1958년 5월 5일부터 23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는 마오쩌동이 제출한 “보다 높게(高), 많게(多), 빠르게(快), 좋게(好), 절약하면서(省)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라는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과 기본 원칙을 통과시켰고, 향후 15년 또는 더욱 짧은 시간 내에 주요 공업생산품 생산량에서 영국을 추월하겠다는 목표를 확정했다. 이 ‘총노선’의 기본 정신은 낙후한 중국의 경제·문화 상황을 가능한 빠르게 바꾸자는 것이었으나 경제발전의 객관적 규율을 무시했다. 즉, ‘총노선’은 점진적으로 소생산 농업을 합작사의 집체경제로 개조하고, 자본주의 상공업을 사회주의 공사합영(公私合營)으로 개조하고, 수공업을 합작화 방식으로 개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사유제를 소멸시키고 자본주의와 소생산을 멸종시켜 단일한 공유제 구조와 고도로 통일된 계획경제체계를 건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개조’의 두 날개라 부를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합작화’였고 또 하나는 ‘일괄 구매 및 판매’였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동은 국내 주요 모순이 이미 전환·변화(轉變)되었다는 분석 의견을 비판하고 중국 사회가 당면한 주요 모순은 여전히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사회주의 노선과 자본주의 노선 간의 모순이라고 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전국의 각 성과 자치구의 대표들이 해당 지구당 조직 정풍운동 과정 중 당내의 이른바 ‘우파분자’, ‘지방주의분자’, ‘민족주의분자’ 그리고 ‘우경기회주의분자’들에 대한 투쟁 경과를 보고한 후 수많은 지방의 지도 간부들을 ‘우파집단’, ‘우경집단’ 또는 ‘반당집단’이라 규정했다.
중공이 취한 이 같은 조치의 배경은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제1서기가 스탈린을 비판한 것에 마오쩌동이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원래 중공은 당원, 비당원 구분 없이 ‘쌍백(雙百) 방침’, 즉 백화제방(百花齊放)과 백가쟁명(百家爭鳴)식 의견 제출과 비판·토론을 자유롭게 개진하라고 장려했었다. 1957년 5월 17일 자 ≪인민일보≫는 중공중앙위원회 결정 사항이라며 “당 외부 인사들도 좀 더 대담하게 당의 결점을 비판해 달라, 당은 당 외부 인사 숙청 같은 것은 결코 생각하고 있지 않다”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말을 믿고 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밝힌 사람들은 곧 이어 진행된 반(反)우파 투쟁 국면에서 혹독한 탄압과 고초를 겪었다. 즉, 대부분 실종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했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을 시작하던 당시에 마오쩌동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전국의 6억 인구 중 10%인 6000만 명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류는 사회주의를 단순히 찬성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은 교육이 필요하다. 다른 한 부류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자들로 약 1200만 명이다. 이들은 진압해야 한다.”
1958년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허베이성의 해변 휴양지인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국민경제계획과 당면한 공업생산, 농업생산, 농촌 공작, 상업 공작 등 문제를 토론하고 일부 공업 및 농업 생산지표를 더욱 과다하게 높여서 확정했다. 특히 다음 해(1959년) 강철 생산량 지표를 그해 생산량(535만 톤)의 두 배인 1070만 톤으로 정했다. 즉, 전 당원과 전국 인민에게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을 진지하게 관철하면서 15년 또는 더욱 짧은 시간 안에 주요 공업생산품 생산량 방면에서 영국을 추월한다는 지표를 확정하고 목표 달성을 독려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제2차 5개년 계획(1958~1962년)을 통과시키면서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과다 목표들을 설정했다.
이와 함께 ‘농촌인민공사 건립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키고, 전국 농촌에 보편적으로 인민공사를 건립한다고 결정했다. ‘결의’에는 “인민공사는 사회주의 건설과 점진적으로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에 가장 좋은 조직 형식이다. 또한 중국이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이미 요원한 장래의 일이 아니다”라는 표현도 포함되었다. 전국적으로 빠른 속도로 인민공사 설립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회의(1958년 베이다이허 정치국 확대회의) 이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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