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0월 , 마오가 패잔병 무리를 이끌고 목적지로 정한 후난성과 장시성 경계인 뤄샤오산맥 중간지점에 위치한 징강산에 도착했다. 징강산 지구는 후난성 링(酃)현과 장시성 닝강, 쑤이촨(遂川), 용신 4개 현(縣)이 만나는 지점에 있고 총면적은 약 4000㎢이다. 징강산을 품고 있는 뤄샤오산맥은 광동성 북부의 후난·장시 두 성의 경계에 접한 지역부터 후베이성 남부까지 뻗어 있다. 각 지구별로 지리적 특성을 비교해 보면, 닝강(宁冈)을 중심으로 하는 산맥 중간 지구 부분이 군대 주둔지로서 가장 유리했다. 북부는 그 지세가 진공과 수비 등 군사행동에 불리했고, 또한 지구내 거점 대도시(政治都會)들과 가까워서 위험했다. 뤄샤오산맥 남부지구의 지세는 북부보다는 좋으나 농민운동 등 군중 기초가 중부보다 못하고 후난·장시 양 성(省) 하류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중부만 못했다. 중부지구에는 1년 이상 경영한 군중 기초와 공산당 조직 기초, 그리고 무장투쟁 경험을 쌓은 지방 무장세력이 있었다.
마오는 이곳이 중심 도시로부터 거리가 비교적 멀고 교통이 불편해 국민당 통치 역량이 미약하고, 높고 험준한 산, 울창한 삼림, 몇 개의 좁은 산길을 통해서만 진출입이 가능한 위치 조건을 파악하고 전진·공격과 후퇴·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이는 산적이나 녹림당 패거리의 입지 선정 원칙 및 기준이기도 했다. 이 같은 지리 조건과 함께 이들 현 모두에는 이미 ‘대혁명시기(1924~1927년)’에 공산당 조직과 농민 자위대가 건립되어 있어서 군중 기초가 비교적 좋았고 츠핑(茨坪), 따샤오우징(大小五井) 등지에 모두 농경지와 촌락이 있어서 주위 각 현 농촌을 대상으로 보급투쟁을 하기에 유리하다는 점도 중요한 선정 이유였다.
따샤오우징이란 지명은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우물이란 뜻으로, 징강산 위의 5개 촌락인 따징(大井), 샤오징(小井), 중징(中井), 상징(上井), 샤징(下井)을 가리킨다. 이는 산봉우리에 층층겹겹 둘러싸인 5개 촌락의 형상이 하나하나 모두 우물(井)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27년 10월 하순, 마오쩌동이 인솔한 무리가 징강산에 올라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당시에 마오가 거주했던 따징은 5개 취락 중 가장 크고, 츠핑 현성(縣城)으로부터 약 7㎞ 거리이며, 마오쩌동보다 늦게 징강산에 온 주더, 천이(陳毅, 1901~1972년), 펑더화이 등도 모두 이곳에 거주했다. 현재 따징의 혁명 유적은 이미 중국의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홍군 병원과 군복 공장 등 따샤오우징의 5개 작은 산촌 안에 있는 혁명 유적들과 함께 ‘홍색 관광상품’이 되었다.
따샤오우징이란 지명은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우물이란 뜻으로, 징강산 위의 5개 촌락인 따징(大井), 샤오징(小井), 중징(中井), 상징(上井), 샤징(下井)을 가리킨다. 이는 산봉우리에 층층겹겹 둘러싸인 5개 촌락의 형상이 하나하나 모두 우물(井)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27년 10월 하순, 마오쩌동이 인솔한 무리가 징강산에 올라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당시에 마오가 거주했던 따징은 5개 취락 중 가장 크고, 츠핑 현성(縣城)으로부터 약 7㎞ 거리이며, 마오쩌동보다 늦게 징강산에 온 주더, 천이(陳毅, 1901~1972년), 펑더화이 등도 모두 이곳에 거주했다. 현재 따징의 혁명 유적은 이미 중국의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홍군 병원과 군복 공장 등 따샤오우징의 5개 작은 산촌 안에 있는 혁명 유적들과 함께 ‘홍색 관광상품’이 되었다.
징강산 지구에는 원래 오랜 기간 동안 산적패를 거느린 패거리와 산두령이 있었다. 당시에는 위안원차이(袁文才)와 왕줘(王佐)를 수령으로 하는 두 개 파의 녹림당 무장 세력이 각각 150~160여 명 병력과 60정 내외의 총을 가지고 있었다. 왕줘의 무리는 산 위의 츠핑과 따샤오우징 등에 주둔하고 있었고, 위안원차이의 무리는 징강산 북쪽 산기슭의 닝강 마오핑(茅坪)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벌전쟁에도 참가했었고 위안원차이는 공산당 당원이었다. 마오의 부대가 징강산에 안착하려면 이들 토박이 녹림당 무리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밖에서 굴러온 무리들이 자신들보다 병력 수와 역량이 강해 보여서 공격을 못하고 긴장 속에 경계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이 두 무리의 붙박이 무장 녹림당을 어떻게 설복하고 쟁취할 것인가? 마오는 우선 공산당원인 위안원차이에 대한 공작부터 시작하고, 다시 그를 통해서 왕줘 (王佐) 에 대한 작업을 진행했다. 마오는 위안원차이 휘하의 병력 수는 160여 명인데 총은 60자루뿐이라는 걸 파악하고, 전적위원회 회의에서 위안원차이에게 100자루의 총을 주자고 제안했다.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주어야 감동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마오의 대담한 제안에 전적위원회 위원들은 우려를 표시했으나 이번에도 마오는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다수결로 자신이 의도한 바 대로 결정을 이끌어냈다.
마오쩌동이 징강산 근거지 건설을 추진하면서 가장 중시한 일은 군대와 지방에 공산당 조직을 건립하는 것과 정치교육이었다. ‘산완개편(三湾改编)’(1927.9) 때부터 군대를 당의 영도하에 두고 각 연대 내에 공산당 지부 건립을 추진했다. 당 지부는 당원에게 3가지 과업을 요구했다. 첫째, 당면한 형세 공부, 둘째, 군중의 상황 이해, 셋째, 신당원의 배양 및 발전이었다. 이후 마오는 자기 부대원들에게 군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군중을 향해 선전 활동과 조직, 무장, 생산노동 지원을 하면서, 실제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했다. 또 의료시설인 ‘홍군의무소’를 설립하고 홍군 주둔지 내 농민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도록 했다. 이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와 함께 마오쩌동 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군중노선’이다.
마오쩌동은 군대 내부의 공산당 조직 건립과 동시에 지방 당 조직의 회복과 발전에도 집중했다. ‘대혁명시기’에 징강산 부근 각 현에 모두 당 조직이 건립되었고 대부분의 당 조직 책임자는 외지에서 돌아온 학생과 당지 농회(農會)의 핵심 인물이었으나 ‘대혁명’ 실패 후 당 조직의 많은 부분이 흩어져 있던 상태였다. 마오핑에 진입한 날 저녁부터 닝강, 용신, 롄화 등 현의 당원들을 모아서 좌담회를 개최했고, 1927년 11월 상순에 다시 마오핑에서 각 현의 원(原) 당 조직 책임자 회의를 개최했다. 다음 해(1928년) 1월 장시성 쑤이촨현 현성 점령 후에는 전적위원회와 완안, 쑤이촨현의 현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했다. 또한, 군대 내의 일부 정치공작 경험이 있는 간부들을 각 현 농촌 기층으로 파견해서 당 조직 건립 업무를 추진토록 했다. 2월에는 각 현에 현위원회, 또는 특별구위원회나 특별지부를 건립했다.
마오쩌동이 혁명 동력 창출을 위해 착안한 또 하나의 중요한 조치는 군대의 임무에 ‘군중(群衆) 공작’을 추가한 것이다. 즉, 군대는 전투뿐만이 아니라 군중 공작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이 마오쩌동은 예로부터 이어져 온 구관념의 속박을 거부하고 풍부한 군중 공작 경험과 독립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실천 과정 중에 만난 새로운 상황과 문제들을 중시하면서, 실제에서 출발하여 대담하게 탐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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