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당 초기에 중공은 소련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의 지도와 지원을 받았고, 주요 당원과 활동가들 대부분이 국민당과 지방 군벌 군대 소속 장교로, 그리고 도시의 노동조합과 농촌의 농회(農會) 지도자 등으로 활동했다. 1926년 7월에 국민당이 ‘국민혁명군’을 조직하고 지방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북벌(北伐) 전쟁을 시작했고 국민혁명군 내의 좌익 성향 장교였던 중공도 그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이다.
국민당이 북벌전쟁을 발동한 명분과 목적은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각지에 할거한 지방 군벌들의 폐해가 갈수록 커지고 극심해져서 이를 척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쑨원(孙文)이 주도한 신해혁명은 청(淸) 왕조를 무너뜨리긴 했으나, 원래 목표로 했던 (서구의 부르주아혁명 성과와 같이) 민주적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혁명 성공후에 초대 총통에 추대되어 취임한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년)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역주행 했고 그 결과 혁명 승리후에 초보적으로 구축되었던 공화정과 헌정 질서조차 붕괴시켰다. 그 결과 중국 전국은 각 지방마다 군벌이 할거하는 혼란·암흑시대가 되었고, 이들 군벌들의 착취와 군벌들 간의 세력 다툼과 전쟁의 와중에서 인민들의 고통이 갈수록 커졌다. 1921년 당시 중국 각지에서 군벌들이 거느린 무장병력의 숫자가 약 150만 명에 달했고, 그중 주요 군벌 세력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우페이푸(吳佩孚, 1874~1939년) 직계(直系) 군벌: 약 20만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세력권은 후베이, 후난, 허난 3개 성과 허베이의 바오딩(保定) 일대.
⦁쑨촨팡(孫傳芳, 1885~1935년): 원래 직계 군벌에 속했으나 독립하여 약 20만의 병력으로, 장쑤, 저장, 안후이, 장시, 푸젠 5개 성 지구를 장악.
⦁장쭤린(張作霖)의 봉계(奉系) 군벌: 약 30만의 병력을 보유, 세력권은 동북 3성과 러허(熱河), 차하얼(察哈爾), 그리고 베이징, 톈진 지구 등. 장쭤린의 아들이 시안(西安)사변을 일으킨 장쉐량(张学良)이다.
이 3개 대군벌 외에도 산서성(山西省)의 옌시산(閻錫山, 1883~1960년), 섬서성(陝西省)의 기독교도 펑위샹(馮玉祥, 1882~1948년), 그리고 기타 각 성 지역에 산재한 수많은 소군벌들이 있었다.
1926년 7월에 중공 세력도 참여한 국공(國共)합작 국민혁명군이 광동성 광저우에서 거병하여 북벌전쟁을 시작했고, 약 1년 만에 우페이푸와 쑨촨팡 등의 군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장강 유역의 상하이, 우한(武漢), 난징(南京) 등 주요 도시를 점령, 장악했다.
그러나 북벌전쟁 승리 후, 대지주와 자산계급의 후원을 받고 있던 북벌군 총사령관 장제스(蒋介石)는 공산당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1927년 4월 12일에는 상하이에서 이른 바 ‘4·12 반공쿠데타’를 일으키고 당내의 좌파세력을 소탕하는 청당(淸黨)을 추진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장제스는 중공이 '반혁명정변(反革命政变)'이라 부르는 이 사건 발동을 통해서 그해(1927년) 말까지 8개월 정도 기간에 당시 중공 당원과 조직의 약 80%를 살해하고 와해시켰다.
광동성 지구에서만 저명한 공산당원인 샤오추뉘(萧楚女), 숑숑(熊雄) 등을 포함한 2000여명이 살해 되었고, 북방 봉계군벌(奉系军阀) 장쭈어린(张作霖)도 수많은 공산당원과 혁명군중을 학살했다.
한편, 이 같은 과정에서 상하이의 조폭조직인 ‘청방(青帮)’의 역할이 컸다. ‘청방’ 조직의 기반은 청나라 초기에 강남의 양곡 수송을 맡았던 선박의 노동자나 하급 병사들이라고 여겨지고 있으며 처음에는 종교 결사의 성격도 있었다.
‘청방’을 구성하는 인원은 출신지에 따라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갈래는 저장성 후저우(湖州), 자싱(嘉興), 항저우 출신으로 구성된 후저우방(湖州帮), 또 한 갈래는 전장(鎭江), 양저우(揚州), 장수 북부(蘇北)의 운하의 연변에서 온 쑤베이방(蘇北帮)이다. ‘청방’의 우두머리들은 소금밀매로 부를 축적하여 화중(華中)지구를 중심으로 도시, 농촌의 하층 사회에 침투하여 세력을 확장하여 장강 하류 지역에서 크게 융성하였고, 밀매업자와 단속 관원들이 상호 이익을 도모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다.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기도 했으며, 지방군벌로 거듭나는 경우도 있었고 상류사회로 진입, 변신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20세기가 되자 많은 상하이의 상인, 기업가들이 이에 가담하였고 상하이 전체를 장악하여 상하이에서 ‘청방’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기업가들은 납치되거나 총에 맞거나 폭탄 세례를 받기도 했다.
‘청방’의 두목인 두웨셩(杜月笙: 1888~1951)은 장제스가 집권하기 전부터 그를 비밀리에 후원하였으며, 장제스 집권 후에는 국민당내 극우파의 수장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웨셩 휘하의 ‘청방’ 조직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화중지역에서 소금 밀수, 아편굴, 도박장, 매춘 등을 관장하고 간부들은 정치계, 실업계에 진출하여 기업가들과 손을 잡고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백색테러 활동을 하였다.
1927년, 국민당군이 북벌전쟁을 통해서 지역 군벌을 제압한 후, 상하이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청방’은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를 부추겨서 국민당내 좌파세력인 중공과 노동조합의 주요 인물과 세력을 대량 학살하여 국공합작을 파괴했다. 이것이 4.12쿠데타의 시작이었다.
도시 노동자 조직과 농촌의 농회(農會) 등을 겨냥한 체포와 학살은 장제스가 주도하는 국민당 우파가 장악한 지역을 넘어서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는 북부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고, 그 결과 북벌전쟁 기간 중 유지되어 온 제1차 국공합작은 철저하게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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